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 영어: Busan Metropolitan City)

대한민국 동남부 해안에 위치한 광역시이다. 대한민국의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해양 물류 도시이며, 부산항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과 물류 산업이 발달하였다. 일본과는 대한해협과 쓰시마섬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시청 소재지는 연제구 연산동이며, 행정구역으로는 15 1을 두고 있다.

부산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무리지어 살기 시작했다. 삼한시대에는 지금의 동래나 남구 등지에는 "거칠산국"이, 기장해운대 등지에는 "장산국", "내산국"이 있었고 서면이나 남포동 등지에는 "가락국" 등의 부족국가가 있었다. 그러다 삼국시대 신라는 서기 1세기 후반인 탈해 이사금 때에 기장의 장산국과 거칠산국을 점령하게 된다.

부산포 일대에는 가야의 종발성이 세워져 신라와 가야의 각축장이 되었다. 내물왕 대인 서기 400년경에 가야가 신라를 침공했다가 광개토태왕의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패망하자 부산 전역이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옛 거칠산국은 거칠산군이 되고 종발성은 "큰 시루"라는 뜻의 대증현(大甑縣)이 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 경덕왕에 의한 행정개편으로 거칠산군은 양주(현재 양산시) 소속의 동래군으로 개칭되었다. 대증현은 동평현(東平縣)으로 개명되어 기장현(機張縣)과 함께 동래군의 관할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격하되고 울주의 속현이 되며 동래군의 속현이던 동평현은 양주(梁州)의 속현이 되었다. 1397년 동래군에 진이 설치되었다. 1405년 울주의 속현이었던 동래현이 독립현이 되고 양주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이 동래의 속현이 되었다. 15세기 전반까지 부산은 ‘부산포’로 불렸다. 동래는 1547년 동래도호부로 승격이 되었다. 1592년 울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을 동래부 남촌면(현재 수영동)으로 옮겼다. 9월1일 이순신이 부산포 해전(부산 해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후에는 부산진이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로 활용되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에 의해 조선이 강제 개항되었을 때, 인천원산과 함께 개항되었고, 왜관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부산은 1877년 1월 《부산구거류지약조》의 체결로 일본이 일본인들의 보호관리 및 통상사무의 관장을 위해 관리관을 파견하면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1880년, 일본은 영사관을 정식으로 설치하고 일본 거류지를 사실상의 일본 영토처럼 만들어 버렸다. 일본은 일본인 가구가 200여 호밖에 안 되던 때부터 장기적으로 도로망을 계획하고 가옥 구조를 규제했으며, 1880년대에 일본은 철도 부설을 위한 측량까지 모두 마치고 식민 통치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부산은 개항 후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일본의 도시처럼 변했고 소수의 일본인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도시로 되어갔다.[2]1895년 6월 23일(음력  5월 1일) 동래부(東萊府) 동래군이 되었고, 이듬해 1896년 8월 4일 경상남도 동래군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부산항이 무역항으로 정비되면서 항구도시로써 발전하게 된다. 1905년에는 경부선이 개통함과 함께 부산역이 개업했다.

일제 강점기 1914년 4월 1일에 부산부는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분할되었고 동시에 외곽의 기장군이 동래군으로 편입되었다. 1925년 4월 1일에는 경상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 아미동으로 이전되었다. 1936년 동래군 서면(현 부산진구 일대)과 사하면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었고, 1942년 동래군 동래읍(현 동래구), 사하면, 남면, 그리고 북면 일부가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9년 8월 15일 (府)를 (市)로 개칭하면서 부산시로 개칭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면서, 부산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되었다. 전쟁을 피해 많은 피란민이 유입되어 인구가 급증했고, 1963년 1월 1일 경상남도 관할에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칭이 '부산직할시'가 아니라 그냥 '부산시'였고, 단지 정부 직할이기 때문에 앞에 경상남도만 붙지 않았을 뿐이었으며, 1981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부산직할시로 불리게 되었다. 다만 당시의 신문 기사 등을 살펴보면 비공식적으로는 부산직할시라는 명칭도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 즉 '직할시'이기는 하였으나 '부산직할시'는 아닌 과도기의 명칭으로, 이 시기를 부산직할시로 표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근래 들어서는, 경상남도 산하 시절과 정부 직할기를 구별하기 위하여 앞에 '정부 직할'을 괄호 병기하여 '(정부 직할) 부산시'로 표기하는 추세이다.

1978년 2월 15일 낙동강 서쪽의 김해군 대저읍, 명지면이 부산시에 편입되었다. 1981년 4월 4일 지방행정에 관한 임시조치법 개정으로 법령상 공식적으로 '부산직할시'의 명칭을 얻게 되었다.[4] 1989년 1월 1일 김해군 녹산면, 가락면이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1994년 12월 20일 지방자치법이 재개정됨에 따라 1995년 1월 1일자로 직할시가 광역시로 일괄 개편되어 부산직할시에서 부산광역시로 개편되었다.[5] 1995년 양산군 기장읍, 장안읍, 일광면, 정관면, 철마면이 부산으로 편입되어 기장군이 신설되었다. 1996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를 열었다. 1999년에 시청사가 중구에서 연제구로 이전하였고, 시청 주변으로 법원·검찰청 등의 관공서도 이전하였다. 2002년 FIFA 월드컵2002년 아시안 게임이 열렸고, 2005년 11월 18일에는 APEC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유래

태종실록》(1431년)에 富山이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며[6] 《경상도지리지》(1425년) ,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경상도 속찬 지리지(1469년) 따위에 “동래부산포”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라 하고, 같은 책 삼포왜관도에도 “동래현 부산포”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부산포는 “부자 富”를 썼다.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의 성종실록에 釜山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가 그린 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 시기는 두가지 표기가 같이 쓰였다. 그러나 이후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 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1481년)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보면, “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 그 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동래부지(1740년) 산천조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일렀는데 밑에 부산, 개운포 두 진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년)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동국여지승람 편찬 이전에는 富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釜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 해사록에 실려 있는 “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에 임하여”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에 나오는 산은 좌천동의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변박이 그린 “왜관도”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 “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 “가모령”이라고 한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감(枾, 嶺)은 한국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를 뜻한다. 그리고 고로(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甑)와 가마(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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